메마른 바닥이 피부를 타고 뼛속까지 전해졌다. 싸늘한 바람이 관절 사이를 뚫고 스며들었다. 갈라진 손끝에서 묻어나오던 피는 굳은 지 오래였다. 비린내도 더 이상 나지 않았다. 촘촘했던 옷감은 다 뜯어져 구멍이 넓어졌다. 뜯어진 옷은 겨울을 막아주지 못했다. 아무것도 들지 않은 위장까지 매서운 바람이 감돌았다. 몸속에 가득 들어가는 게 찬바람인데 왜 내 허기...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기억일지도 모른다. 깨진 유리처럼 흩뿌려진 조각들이 날카롭게 빛났다. 햇빛 아래로 뿌려지는 물방울처럼 보이기도 했다. 반짝이는 조각 속에는 사람들이 영화의 짧은 장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은 뒤에 햇빛이라도 있는지 역광 때문에 흐릿하게 보였다. 그리고 조각에서 나오는 장면은 고작 삼 초에서 오 초 사이였다. 이 조각들은 ...
프라이팬 위로 빗소리가 울렸다. 동그랗게 퍼진 부추전 반죽이 천천히 익어 갔다. 가장자리는 노릇하게 타들어 가고 뜨거운 기름이 먹음직스러운 소리를 내며 튀었다. 다른 사람들은 뒤집개로 뒤집겠지만 나는 프라이팬을 움직여 뒤집는 게 편했다. 손목을 이용해 잘 구워진 부추전을 노련하게 뒤집었다. 순간 조용해진 부엌에 다시 기름 튀는 소리가 퍼졌다. 느끼한 반죽 ...
감긴 눈 위로 빛이 쏟아졌다. 하얀 빛은 얇은 눈꺼풀을 뚫고 눈에 들어왔다. 빛은 멀리 있는 것 같기도, 가까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얀 빛이 넓게 퍼져서 얼굴을 감싸는 듯했다. 시야가 하야니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이미 아득해졌을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무미건조한 빛은 내 속눈썹 하나하나를 어루만졌다. 가느다란 속눈썹이 일렁이는 걸 상상했...
깊은 녹색 나뭇잎과 진한 동백이 대비 되어 보였다. 추운 겨울, 다른 꽃들이 잠들어 있을 때 동백 혼자 강인하게 피어 있었다. 매섭게 부는 바람에도 동백은 천천히 흔들릴 뿐이었다. 향기를 맡으려 했지만 아무 향도 맡을 수 없었다. 코로 세게 숨을 들이 마실 때 코끝이 아린 겨울 냄새가 났다. 그리고 조용히 나뭇잎이 파릇한 향기를 풍겼다. 꽃잎이 촉촉하게 손...
휴대폰 시계는 오전 두 시 36분에서 37분으로 넘어갔다. 화면을 껐을 때 방은 고요한 어둠이 가득했다. 혼자였지만 괜히 어색한 기분이 들어 이불 스치는 소리를 내보기도 하고 아―하고 짧게 방을 울려 보기도 했다. 똑바로 누워 천장을 바라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천장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밤눈이 어두워서 그런 걸까. 눈을 아무리 크게, 세게 떠 ...
전봇대 아래서 아이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전봇대 때문인지 더 작아보였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시내였지만 아이에게 다가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에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더 무겁게 들렸다. 나 역시 무심한 무리에 끼고 싶었으나 오 년 전, 동생의 모습과 아이가 닮아서 무시할 수 없었다. 아이 앞에서 쪼그려 앉아...
문득이라는 단어가 좋았다. 뚝하고 끊기는 느낌이지만 뒤에 말이 와야 완성되는 단어. 문득, 카레 향이 코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것 같았다. 매콤한 카레 향 속에는 상큼한 사과 향이 섞여있었다. 코를 계속 킁킁거렸지만 카레 향은 코 안쪽에서 올라올 뿐이었다. 곧 매콤했던 카레 향이 사과 향으로 바뀌었다. 문득. 그는 식물에 물주는 걸 좋아했다. 식물을 키우...
미닫이문을 열자 꽃향기가 훅 끼쳤다. 촉촉한 물 향기와 생기 가득한 꽃잎 향이 코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 어제 청소를 했는데도 바닥은 물기가 가득했다. 바닥에 쌓인 신문지가 얼룩덜룩하게 물들어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빨간 장미가 가득 모여 있었다. 꽃잎 사이사이에 맺혀 있는 물방울들이 붉게 빛났다. 장미는 빨리 팔리기 때문에 많이 들여 놔야 한다. 겨울이...
4월 22일. 첫 실험의 대상은 카나리아. 별 생각 없이 키우고 있던 것이 여기에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깃털을 닦아 내면 DNA가 더 잘 채취되지 않을까. 단모종보다 새가 훨씬 수월할지도. 새장 속 카나리아를 투명 관으로 옮겼다. 자주 확인하기 위해 책상으로 투명 관을 옮겼다. 좁은 공간에서 카나리아는 계속 날갯짓을 해대었다. 얼마나 움직인 걸까. 관 ...
작은 성과 마을 그리고 여인이 있었다. 여인의 몸은 매우 아름다워 사람들은 후광이 비친다고 말했다. 여인은 자신의 몸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기에 밝고 얇은 재질의 옷을 입고 다녔다. 여인의 빛과 햇빛이 하늘거리는 옷에 부딪혀 여인을 더 아름답게 빛내주었다. 아름다운 몸 때문인지 사람들은 여인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림자가 드리운 여인의 얼굴은 사...
오렌지. 내가 다니는 미술학원의 이름이다. 초등학교 앞에 있는 작은 미술학원은 아이들의 목소리로 시끄러워진다. 보일러가 돌아가지 않는 학원이지만 아이들의 열기로 따뜻하게 데워지는 기분이 든다. 선생님은 종종 학원을 운영하지 않는 일요일에도 문을 열기도 하신다. 일요일은 선생님의 작업 날이고 나는 조용한 학원에 앉아 함께 그림을 그린다. 아이들의 열기가 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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